자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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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마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기원전 202년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하여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나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카르타고는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상실, 군사력 제한 등의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맺고 로마에 종속되었다. 자마 전투의 결과는 이후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져 카르타고의 멸망을 초래했으며, 로마의 지중해 제국 건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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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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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자마 전투 |
부분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
![]() | |
날짜 |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
장소 | 자마, 북아프리카 (현대 실리아나, 튀니지) 근처 |
좌표 | 17 |
결과 | 로마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누미디아 왕국 |
교전국 2 | 카르타고 |
지휘관 및 지도자 | |
로마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마시니사 |
카르타고 | 한니발 |
병력 규모 | |
로마 | 약 30,000명 |
로마 보병 | 약 24,000명 |
로마 기병 | 약 6,000명 |
카르타고 | 40,000명 또는 50,000명 |
카르타고 보병 | 36,000명 또는 46,000명 |
카르타고 기병 | 4,000명 |
카르타고 전투 코끼리 | 80마리 |
사상자 및 피해 | |
로마 | 최소 1,500명 사망 |
카르타고 | 20,000명 사망 20,000명 포로 |
2. 배경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로마의 동맹국들을 봉기시키지는 못했다. 메타우로 전투에서 지원군으로 오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전사하고, 또 다른 동생 마고네도 부상을 입어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후 북아프리카에 교두보를 마련했으나, 로마 원로원의 반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마시니사와 함께 서부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격파하고 기병을 확보하면서 스키피오는 공세에 나섰다.[2]
양측은 강화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으나, 카르타고에서 강경론이 우세해져 결렬되었다. 로마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 포기, 5천 탈란트의 전쟁 배상금, 카르타고 해군 해체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한니발과 마고네는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고 1만 2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돌아왔지만(마고네는 항해 중 사망), 카르타고는 강경론이 우세해져 협상을 결렬시켰다.[3]
전투 전날,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단독으로 만났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언급하며 운명의 불확실성을 강조하고 위험한 도박을 피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로마의 강화 조건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결전을 선언했다.[4]
2. 1.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과 전개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이는 로마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4]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 칸나이 전투 등에서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4]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완전히 분열시키지 못했고, 지원군으로 오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도 메타우로 전투에서 전사하여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군을 격파하고, 북아프리카로 진격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다.[1]2. 2. 로마와 카르타고의 상황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활약으로 로마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원로원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하고 북아프리카에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원로원은 카르타고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반대했다.[2] 그러나 마시니사와 함께 서부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물리치고 기병을 획득하자 스키피오는 자신감을 얻고 공세에 나섰다.[2]한편,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본국으로 소환하여 전력을 재편하려 했지만, 내부적으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있었다. 로마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 포기, 5천 탈란트의 전쟁 배상금, 카르타고 해군 해체를 조건으로 제시했다.[3] 한니발과 마고네는 카르타고 본국의 송환 명령을 받고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돌아왔지만(마고네는 항해 중 사망), 카르타고는 강경론이 우세해져 협상을 결렬시켰다.[3]
기원전 205년 초, 스키피오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5]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 침공을 예상하고 누미디아 지도자 마시니사, 시팍스와 협상하여 마시니사를 동맹으로 만들었다.[5] 로마 정치계에서는 북아프리카 침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스키피오는 시칠리아를 관할 구역으로 배정받고 아프리카로 건너갈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징집할 수 없었고 자원병만 모집해야 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한 생존자들이 시칠리아로 보내졌고, 이들이 로마 원정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전투 병력을 25,000~30,000명으로 추산하며, 그 중 90% 이상이 보병이었다. 스키피오는 엄격한 훈련 체제를 시작했고, 약 1년 동안 지속되었다. 동시에 스키피오는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물자, 상선, 군함을 모았다.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의 부관 가이우스 렐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선박이 북아프리카를 습격하여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획득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징집했으며, 마고에게 증원군이 파견되었다. 한편, 누미디아에서 계승 전쟁이 발발했고, 렐리우스는 마시니사와 다시 연락을 취했다.
카르타고 시민들은 카르타고 도시에 직접적인 위협이 있을 경우에만 군 복무를 했다. 그들은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갑 보병으로 싸웠지만, 훈련과 규율이 부족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카르타고는 외국인을 모집했다. 이들은 대형 방패, 헬멧, 단검, 장창으로 무장한 밀집 대형 보병, 투창으로 무장한 경보병 산병, 창을 휴대하는 근접 충격 기병, 경 기병 산병 등 여러 유형의 전사를 제공했다.
밀집 대형 아프리카 보병과 시민 민병대는 팔랑크스라고 알려진 밀집 대형으로 싸웠다. 때때로 일부 보병은 노획한 로마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다. 이베리아와 갈리아는 경험이 풍부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보병을 제공했고,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발레아레스 투석병이 모집되었다. 카르타고는 또한 전차 코끼리를 사용했는데,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숲 코끼리가 서식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영토를 제압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토 침공 작전을 시작했다. 기원전 204년 봄,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북아프리카의 우티카 부근에 상륙했다. 카르타고군은 누미디아군과 함께 로마군을 요격하러 갔지만, 스키피오는 두 번의 전투에서 이를 격파했다. 더욱이, 퇴각하는 누미디아군을 본국까지 추격하여 왕 시팍스를 포로로 잡았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후임 누미디아 왕으로 즉위시켜 평화 동맹을 맺고 누미디아를 로마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3. 전투 전 상황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의 혁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을 봉기시키지 못했다. 지원군으로 오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메타우로 전투에서 전사하고, 또 다른 동생 마고네도 부상을 입어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승리하고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확보했으나, 원로원의 반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시니사와 함께 서부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물리치고 기병을 확보하자 자신감을 얻어 공세에 나섰다.
그 사이 양측은 강화를 위해 협상을 진행했다. 로마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 포기, 5000탈란트의 전쟁 배상금, 카르타고 해군 해체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한니발과 마고네는 카르타고 본국의 송환 명령을 받고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돌아왔다(마고네는 항해 중 사망). 그러나 카르타고는 강경론이 우세해져 협상을 결렬시켰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북아프리카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전날 두 사람은 단독으로 만났다고 한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언급하며 위험한 도박을 피하자고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로마의 강화 조건을 다시 한번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아 결국 전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5]
3. 1. 강화 협상과 결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에 다음과 같은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1]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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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카르타고의 독립 및 자치권을 인정한다. |
이탈리아 및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지방에 있는 카르타고 군은 모두 철수한다. |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에 가지고 있는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 |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왕국을 인정하고 그 주권을 존중한다. |
군선은 20척을 제외하고 로마 측에 인도한다. |
이 강화 협상 중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 있는 로마 군의 군량을 부담한다. |
배상금 5000탈란트를 지불한다. |
로마 측에서는 원로원과 시민 집회가 스키피오의 조건을 승인하여, 한때 휴전이 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스키피오에게 보내진 로마의 보급선단이 폭풍을 만나 카르타고에서 약 40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한 것을 카르타고 해군이 나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 로마는 반환을 요구했지만, 이 사건과 한니발의 귀국으로 강경해진 카르타고는 위의 조건을 거부하고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1]
3. 2. 누미디아의 역할
누미디아는 자마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고 로마군에 합류하여, 로마군의 기병 전력을 강화했다. 마시니사는 보병 6,000명과 기병 4,000명을 이끌고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4]반면, 한니발은 시팍스의 아들로부터 소수의 누미디아 기병을 지원받았지만, 그 수는 2,000명에 불과해 전력 차이가 컸다.[4] 대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영토를 제압한 후, 기원전 204년 봄 북아프리카의 우티카 부근에 상륙했다. 카르타고군은 누미디아군과 함께 로마군을 요격하러 갔지만, 스키피오는 두 번의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또한, 스키피오는 퇴각하는 누미디아군을 추격하여 왕 시팍스를 포로로 잡고,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즉위시켜 누미디아를 로마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3] 이는 카르타고로부터 강력한 누미디아 기병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3. 3. 양측 지휘관의 회담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북아프리카에서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전날 두 사람은 단독으로 대면했다고 한다. 이 단독 회담에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업적을 상기시키면서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위험한 도박을 피하고 여기서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로마의 강화 조건을 거듭 주장하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하여 결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5]한니발은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양군은 서로를 향해 진군했는데, 그 거리가 6km 정도 되었을 때 스키피오가 사자를 보냈고, 양군은 정지하여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다음 날,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각각 기병 1개 부대를 이끌고 양군 중간에 있는 낮은 언덕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모두 언덕 중턱쯤에 기병을 배치하고 통역만 데리고 나아가 회담을 시작했다.
한니발은 한때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었던 자신이 지금은 자국의 위기를 구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언급하며, 현재 상황이 어떻든 전투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로마가 시칠리아, 사르데냐, 스페인을 영유하는 것을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했다. 스키피오는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카르타고 측이라는 점, 한니발의 이탈리아 철수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아프리카 침공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들며, 평화 조건은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회담은 끝나고, 다음 날 아침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3. 4. 양측 군대의 배치
로마군은 중장보병을 중앙에, 양옆에 동맹 군단을 배치하고, 전열에는 hastatila(청년병), 그 뒤로 principesla(장년병), triariila(노병) 순으로 배치했다.[1] 각 군단의 마니풀(120명으로 구성된 로마 보병의 기본 기동 부대)은 일반적인 "체커보드" 또는 quincunxla(오각형) 대형 대신, principesla 마니풀을 hastatila 마니풀 바로 뒤에 배치하여 넓은 통로를 만들었고, 이 통로는 로마 경보병 velitesla(벨리테스)가 차지했다.[1]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 4,000명이 보병 오른쪽에, 라엘리우스가 이끄는 1,500명의 로마 및 동맹 기병은 왼쪽에 배치되었다.[1] 다카마스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 600명도 있었으나, 마시니사 또는 라엘리우스 부대 소속 여부는 불분명하다.[1]
카르타고 군대는 한니발 지휘 아래 세 개의 다른 군대 생존자들로 구성되었는데, 통합된 지휘 체계 구축 시간이 부족하여 각 부대를 분리 배치했다.[2] 카르타고 보병은 로마군처럼 중앙에 배치되었고,[2] 제1열은 마고의 이탈리아 북부 원정 실패에서 살아남은 베테랑( 이베리아인, 골족, 리구리아인 포함)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다.[2] 이 앞에는 발레아레스 투석병, 무어 궁수, 무어 및 리구리아 창병으로 구성된 경보병 산병대(총 12,000명)와 전투 코끼리 80마리가 배치되었다.[2]
제2열은 이전 전투 생존자나 훈련 부족 신병으로 구성된 카르타고인 및 기타 아프리카인들이었다.[3] 폴리비오스는 팔랑크스 대형을 묘사했지만, 현대에는 논쟁이 있다.[3] 제2열 규모는 불분명하나, 12,000명으로 추정된다.[3] 제2열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보병(대부분 브루티족, 17년 전 이베리아 출신 아프리카인과 이베리아인, 기원전 218년과 217년 이탈리아 북부 모집 골족 포함)이 있었고,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다.[3] 제3열은 12,000명,[4] 15,000~20,000명,[5] 또는 20,000명으로 추정된다. 한니발은 약 4,000명의 기병을 투입, 누미디아 기병을 좌익에 배치하여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과 대치시키고, 나머지 아프리카 기병을 우익에 배치했다.
전투 참가 병력은 다음과 같다.
'''로마군'''
구분 | 병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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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 23,000-29,000 |
기병 | 1,500-2,500 |
'''누미디아군'''
구분 | 병력 |
---|---|
보병 | 6,000 |
기병 | 4,000 |
스키피오는 중장보병을 중앙에, 경장보병을 전면에, 로마 기병을 좌익에, 누미디아 기병을 우익에 배치했다. 전투 코끼리를 고려해 중대(마니풀루스) 간격을 넓혀 샛길을 만들고 코끼리 돌격을 피하려 했다. 스키피오는 중앙 지휘, 좌익 로마 기병은 가이우스 라엘리우스, 우익 누미디아 기병은 마시니사가 지휘했다.
'''카르타고군'''
구분 | 병력 |
---|---|
보병 | 40,000-50,000 |
기병 | 1,000-2,000 |
전투 코끼리 | 80 |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최전열에, 3열 보병을 후방에, 기병을 양익에 배치했다. 보병은 용병(리구리아인, 켈트인), 리비아인 및 카르타고 시민병, 이탈리아 베테랑 병사로 구성, 신뢰도 순서(용병, 시민병, 베테랑)로 배치했다. 1열은 마고, 2열은 한노 보밀카르, 3열은 한니발이 지휘했다.
3. 5. 전투의 전개

한니발은 보병의 질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로마군 진영으로 돌격시켰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코끼리에 대비해 평소보다 넓게 소대 간격을 벌리고 경무장 보병도 소대 단위로 편성하여 능숙하게 대처했고, 코끼리 돌격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1]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의 보강으로 숫자가 더 많아져서 카르타고 기병을 밀어냈다.[1] 로마 보병은 전진을 시작하여 카르타고의 혼성군과 시민병 대열을 물리쳤다.[1] 카르타고군은 등을 돌려 달아나려 했으나, 네 번째 대열에서 뒤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좌우로 흩어져 달아났다.[1]
한니발은 로마군이 지쳤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정예 보병을 전진시켰다.[2]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정예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지친 하스타티를 좌우로 분산시키고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를 합쳐 전면에 내세웠다.[2] 치열한 전투 중, 적을 추격하던 로마 기병이 돌아와 카르타고 군대의 뒤를 공격하자 한니발의 군대는 무너졌다.[2]
전투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1. 전투 코끼리 돌격: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이용해 로마군 전열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스키피오는 미리 넓은 간격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꽹과리 등으로 코끼리를 혼란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코끼리들은 로마군 전열 사이의 틈으로 빠져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카르타고군 쪽으로 되돌아갔다.
2. 기병 전투: 누미디아 기병의 지원을 받은 로마군 기병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카르타고 기병을 몰아내고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3. 보병 전투 (1단계): 로마군 보병은 카르타고군 제1열(용병)과 제2열(시민병)을 차례로 압도했다. 카르타고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궤주(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남)하였다.
4. 보병 전투 (2단계): 한니발은 정예병으로 구성된 제3열을 투입하여 로마군 중앙을 압박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카르타고군에 맞섰다.
5. 로마군 기병 복귀 및 카르타고군 포위: 전장에서 이탈했던 로마군 기병이 돌아와 카르타고군 후방을 공격했다. 동시에 로마군 보병은 카르타고군의 측면을 압박하여 포위망을 형성했다.
6. 카르타고군 궤멸: 포위된 카르타고군은 대부분 항복하거나 전멸했다. 한니발은 소수의 병력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약 20,000명이 전사하고, 그와 거의 같은 수의 포로를 냈으며, 로마군은 약 1,5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칸나이 전투와 마찬가지로 기병의 후방 기동이 전투의 결과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스키피오가 사용한 글라디우스가 보병 간의 백병전에서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4. 결과 및 영향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 전투로 16년 만에 막을 내렸다.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받아들여 전쟁을 끝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징벌적 휴전 조항을 적용하여, 카르타고가 다시는 지중해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이 전투의 영향으로 카르타고는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약 70년 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지만, 카르타고는 자신의 영토를 간신히 지킬 정도의 군사력만 보유하고 있었다.
4. 1. 전투의 결과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전사자와 포로를 합해 4만 명의 피해를 입었고, 로마군은 1,500명에서 최대 4,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16년간 이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났다.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승인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이후 로마의 징벌적 휴전 조항으로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군사 강국으로 다시 성장하지 못했다. 약 70년 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지만, 카르타고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정도의 군사력만 보유했다. 결국 이 전투로 카르타고는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폴리비우스는 카르타고군 2만 명이 살해당하고, 같은 수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로마군 사망자는 1,500명으로, 이는 전체 병력의 5% 이상이다. 골즈워시는 이를 "승리한 군대의 상당한 손실이며, 치열한 전투의 증거"라고 평가했다.

로마가 카르타고에 부과한 평화 조약은 카르타고의 해외 영토와 일부 아프리카 영토를 빼앗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50년에 걸쳐 10,000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인질이 잡혔으며, 전쟁 코끼리 소유가 금지되었고 함대는 10척으로 제한되었다. 또한 아프리카 밖에서는 전쟁을 할 수 없었고, 아프리카 내에서도 로마의 허가 하에서만 전쟁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카르타고 고위 관계자들이 이를 거부하려 했지만, 한니발은 강력하게 지지하여 기원전 201년 봄에 조약이 수용되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로마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었다.
자마 전투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에게 강화를 요청했고, 스키피오는 더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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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허가 없이는 아프리카 내외에서 전쟁 금지. |
모든 전투 코끼리와 군함 500척 인도. |
유력자 자제 100명 인질 인도. |
50년 이내 은 1만 탈렌트 지불. |
마시니사에게 선조 전래 영토와 자산 반환. |
히스파니아 등 모든 해외 영토 포기. |
카르타고는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해군도 10척으로 축소되어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 지중해 패권을 잃었다.
4. 2. 장기적 영향
이 전투로 16년을 끌어온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결되었다.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승인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후 로마의 징벌적 휴전 조항에 의해 카르타고는 다시는 지중해에서 군사 강국이 되지 못했다.[1] 약 70년 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때도 카르타고는 자신의 영토를 간신히 지킬 만한 군사력만 가질 뿐이었다.[1] 결국 이 전투의 영향으로 카르타고는 쇠락과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1]로마가 카르타고에 부과한 평화 조약은 카르타고의 해외 영토와 일부 아프리카 영토를 빼앗았다. 50년에 걸쳐 10,000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인질이 잡혔으며, 카르타고는 전쟁 코끼리를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함대는 10척의 군함으로 제한되었다.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밖에서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프리카 내에서는 로마의 명시적인 허가 하에서만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많은 카르타고 고위 관계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싶어했지만, 한니발은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기원전 201년 봄에 수용되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정치적으로 로마에 종속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스키피오는 개선식을 수여받았고 아그노멘la "아프리카누스"를 받았다.
마시니사는 카르타고가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지한 조항을 악용하여 카르타고 영토를 반복적으로 습격하고 점령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호소했고, 로마는 항상 누미디아 동맹을 지원했다. 기원전 149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지 50년 후, 카르타고는 하스드루발 보에타르크 휘하의 군대를 마시니사에게 보냈지만,{#tag:ref|88세의 마시니사는 여전히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고 자녀도 두었다. 그는 기원전 148년에 사망했다.|group=note}} 조약은 무시되었다. 이 원정은 오로스코파 전투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로마의 반 카르타고 파벌은 불법적인 군사 행동을 징벌 원정을 준비하는 구실로 삼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 후반, 대규모 로마 군대가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카르타고를 포위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146년 봄, 로마군은 최종 공격을 감행하여,{#tag:ref|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이끌었다.|group=note}} 도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했다. 생존자 5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이전 카르타고 영토는 로마에 병합되어 로마 아프리카 속주가 되었고, 우티카가 수도가 되었다.
자마 전투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에게 강화를 요청했고, 스키피오는 이전에 제시한 조건보다 더 가혹한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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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허가 없는 아프리카 내/외 에서의 전쟁 금지. |
모든 전투 코끼리와 군함 500척을 인도할 것. |
유력자의 자제 100명을 인질로 인도할 것. |
50년 이내에 은 1만 탈렌트 지불. |
마시니사에게 선조 전래의 영토와 자산 반환. |
히스파니아 등 모든 해외 영토 포기. |
카르타고는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 해군도 10척으로 줄어들어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5. 평가 및 논란
포에니 전쟁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한 주요 출처는 기원전 167년 로마로 인질로 보내진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기원전 200년경 – 기원전 118년경)이다. 그는 기원전 146년경에 쓰여진 ''역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저술은 고대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국의 관점에서 광범위하게 객관적이고 대체로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폴리비오스는 분석적인 역사가였으며 가능한 한 그가 쓴 사건에 참여한 양측의 참가자들을 인터뷰했다.
폴리비오스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기록을 사용한다.
다른 후대의 고대 전쟁 역사도 존재하지만, 종종 단편적이거나 요약된 형태이다. 현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아피아누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저술을 고려한다. 다른 출처로는 동전, 비문, 고고학적 증거 및 트리림 ''올림피아스''와 같은 재구축의 실증적 증거가 있다.
5. 1.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평가

리비우스의 기록은 폴리비오스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현대 역사가들이 사용하지만, 고전학자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리비우스의 "신뢰성은 종종 의심스럽다"고 평가하며, 역사가 필립 세이빈은 리비우스를 "군사적 무지"라고 언급한다. 덱스터 호요스는 자마에 대한 리비우스의 기록을 "그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폴리비오스의 기록과 기괴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묘사한다.
아피아누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저술은 존 레이즈비에 의해 리비우스보다 "분명히 훨씬 열등하다"고 평가된다. 호요스는 아피아누스가 자마에 대한 그의 기록에서 기괴한 발명을 했다고 비난하고, 마이클 테일러는 그것이 "독특하다"고 말한다.
5. 2. 전투의 중요성에 대한 논란
폴리비오스의 기록의 정확성은 지난 150년 동안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현대 자료의 전쟁에 대한 세부 사항은 주로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대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다.[1] 앤드루 커리는 폴리비오스를 "꽤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크레이지 B. 챔피언은 그를 "놀랍도록 정보가 풍부하고, 부지런하며, 통찰력 있는 역사가"라고 묘사한다.[1] 그러나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폴리비오스가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스킬피오 아에밀리아누스의 친족들을 부당하게 편애했다고 생각한다.[1]참조
[1]
서적
アッピアノス ポエニ戦争 40-41節
[2]
서적
リウィウス ローマ建国史 30巻35節
[3]
서적
ポリュビオス 歴史 15巻14節
[4]
서적
アッピアノス ポエニ戦争 48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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